총괄진 1차 특혜로 받아낸 배경^^
아래글감상하고가시오^^
반이 달라진 교내 커플이 학기 초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약속 필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학교 일과 중 어느 장소에서 어느 시간에 정기적으로 만날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비록 반이 달라졌다 한들 바로 옆 반이고, 함께 기숙사에 살기 때문에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온종일 붙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해도.
따라서 설예원과 예주현은 많은 교내 커플이 그러하듯, 학기 초 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급식을 먹고 난 뒤부터 학교 뒤편 공터에서 5교시 시작 전까지는 반드시 함께 있기. 싸우거나, 수업이 늦게 끝나거나, 밥을 늦게 먹는다 해도 만남은 반드시 그곳에서.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에 가야 해도, 학생회의 회의가 있어 남은 점심시간 모두를 쏟아부어야 한다 해도 일단은 그곳으로. 그리고 보지 못했던 오전의 안부를 묻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오후를 버틸 힘을 얻기.
"…더워어."
"덥다고 하면 더 더워져…."
"더워, 더워, 더워, 더워."
"야!"
“흥, 근데 주현아. 어디서 장미 향 나지 않아? 누가 근처에서 향수 뿌렸나.”
“뭔 소리야?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너도 오늘 그 향수 아니잖아.”
“…착각했나? 근데 너무 진하게 나는데.”
여름 방학이 일주일 남은 학교는 전체적으로 느슨했다. 시험도 끝, 시험 성적 배부도 끝. 대학이 중요한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들어갈 문장들을 적당히 골라내는 것에만 근 한 달을 소비했다. 선생님과 더불어 학생들도 죽어 나간 달이었다. 누군가는 툭하면 울었고 누군가는 툭하면 종이를 찢었다. 학교에 사람이 아니라 좀비만 가득한 것 같았다. 예주현이 제 앞에서 갑자기 공책을 찢으며 우는 설예원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선생님에게 확인받은 정결한 문장들을 제 서류에 적는 데 성공한 이후부터는 다시 멀쩡한 낯으로 돌아왔지만.
사랑은 불합리한 점이 있다. 덥다고 불평했을지언정 코를 찡그리며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오는 설예원을 만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한술 더 떠 제 빈손까지 파고드는 얇은 손가락을 가볍게 감싸며, 예주현은 지난 일 년간 그랬듯 핸드폰으로 늘 듣던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춘다. 수시로 대학에 가려는 주제에 혹시 모를 논술도 대비해야 한다며 그를 달달 볶았던 설예원 덕에, 만나면 ASMR처럼 라디오를 틀어두곤 했던 것이다. 설예원은 그 손길을 나른하게 쳐다보았다.
"졸려?"
─현재 기이한 현상이 관측되고 있는 가운데,
"…조금?"
"이 시간에?"
─한 누리꾼이 제보한 영상에서는,
"이상하지… 잠 올 시간 아닌데."
설예원은 한숨 같은 하품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다.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 중에서도 예주현과 설예원은 소위 말하는 '모범생'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것이 관성이며,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는 잠들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체력도 있는 열여덟 살이었다. 어찌나 자기 관리가 지독한지 봄에 누구나 찾아온다는 식곤증마저도 꾸준한 운동과 생활 습관으로 극복해 내는 설예원이 아니던가. 물론 그 악독한 자기 관리를 투덜거리면서도 따라가는 예주현이 할 감상은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은 여름이었다…… 봄 따위가 아니라.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설예원은 흘러나오는 라디오에 관심을 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졸음기 가득한 눈. 점점 더 힘이 풀리는 듯한 손가락을 느끼며, 예주현은 불현듯 제 눈앞에서 급작스레 비일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받아들이기엔 너무 가파른 변화가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예주현은 미지未知 파헤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탐험가가 아니기에, 이 뜻 모를 상황이 무서웠다. 처음 보는 길도 용감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설예원이지 그가 아니었다. 미끄러지려는 손가락을 꽉 붙든 채, 예주현이 손을 뻗었다.
"…야, 설예원, 정신 차려봐. 너 지금 왜 졸려? 눈 떠!"
"근데 주현아."
─ 식물들이 급속도로 자라고 있습니다.
"왜!"
"라디오가, 좀 이상하다… 그치."
─ 종種을 막론하고 장미를 피워내는데,
"또 누가 거짓말로 제보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이 라디오 좀 그만 듣자고 했잖아. 넌 눈이나 떠. 이 라디오는 우리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될…."
"저기 봐…."
"…어?"
─ 그 향香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죽은 듯한 잠에 빠져,
"…자라고 있는데."
"뭐……?"
─ 무슨 짓을 해도 깨어나지 않는 광경을 목격하여….
예주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였다. 저 끝에서부터,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구치고 있는 줄기와 이파리들. 그 사이에 점처럼 만개하고 있는 장미꽃. 시야 가득 붉은 꽃잎이 환상처럼 흩날렸다. 저 멀리서 피어난 장미의 꽃잎이 꽤 거리가 있는 예주현의 코 앞까지 날리는 것을 보아하니, 장미는 하늘로 치솟는 식물 사이를 비집고 못 해도 수천 송이가 자라났을 것이다. 지금도 슬그머니 가까워지고 있는 초록의 향연 속에 파도처럼 붉은 점이 일렁이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그런 감상을 남기리라.
─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반드시 방독면을 찾아 쓰십시오. 잠에 빠진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장미 향’을 맡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그러나 기이한 것은 그토록이나 많이 피었을 장미에는 분명 향이 있어야 마땅한데도, 예주현의 코에는 설예원이 최근 자주 뿌리곤 했던 향수 말고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불현듯 깨닫자마자, 예주현은 공포에 질렸다. 눈앞의 광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으나, 동시에 섬뜩했다. 창백하게 질린 예주현의 시야가 간신히 아래로 향했다. 죽은 듯 눈을 감은 설예원은 이제 아주 옅은 숨만 내쉬고 있었다. 죽음은 신록의 색이었고 절망은 붉었다. 설예원의 어깨로 장미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발작적으로 쳐내며, 예주현은 일단 설예원을 업어들었다. 죽음과 닮은 잠에 빠진 사람의 몸은 평소보다 무거웠으나 예주현은 개의치 않았다. 불행하게도 예주현에게는 설예원을 두고 도망친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등 뒤로 녹음이 성큼 가까워져도 그랬다.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불합리하게도.
파도처럼 붉은 절망이 왔다. 속절없이 그 파도에 발목이 휘감기며 예주현은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